요약
시민이 돈을 모아 재단을 세우겠다는 설립제안서를 검토했다. 잘 쓴 문서였다. 비전도 사업도 정관 초안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표의 숫자를 실제로 더해 보니 두 개의 그릇에 담을 돈이 어디서 오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이 글은 두 가지 기술을 다룬다. 첫째, 계획서의 숫자를 직접 검산해 설계의 구멍을 찾는 법. 둘째, 찾아낸 것 가운데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을 서체로 갈라 남기는 법이다.
둘째가 더 중요하다. 공론장에서 합의할 수 있는 것과, 관계기관에 물어봐야 답이 나오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같은 서체로 섞어 놓으면 사람들은 물어봐야 할 것까지 합의해 버린다.
왜 이 기술인가
활동가가 쓰는 사업계획서에는 세 종류의 문장이 섞여 있다.
- 확정된 사실 — 법이 이렇게 돼 있다, 우리 조합은 몇 개다
- 우리가 정할 일 — 이사를 몇 명 둘까, 어느 마을부터 시작할까
- 물어봐야 아는 것 — 이 사업에 등록이 필요한가, 저 기금을 민간에 줄 수 있는가
셋을 같은 서체로 쓰면 읽는 사람은 전부 첫째로 읽는다. 그리고 셋째가 틀린 것으로 밝혀지면 그 위에 쌓은 합의가 함께 무너진다. 재원 계획의 3할이 제도 개정에 묶여 있는데 그 종속성이 표에 드러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달성된 미래를 전제로 역할을 나눈다.
기술의 핵심은 구분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단계별 따라하기
1단계. 표의 숫자를 실제로 더한다
읽기만 해서는 못 찾는다. 합계가 적혀 있어도 다시 더한다.
검토한 문서에서는 이렇게 나왔다.
- 재원 일곱 갈래의 합계: 80+400+80+200+120+60+60 = 1,000억
- 그런데 이 1,000억은 문서가 말한 “시민기금 목표액”과 정확히 같은 값
- 같은 1,000억이 세 개 계정(900+60+40)에 전액 배분돼 있었다
여기서 결론이 나온다. 문서가 나란히 내건 네 개의 목표 가운데 시민기업펀드 300억과 보증재원 100억은 조달 계획이 없다. 목표 총액은 실제로 1,400억인데 재원표는 1,000억만 설명하고 있었다.
이건 작성자의 부주의가 아니다. 성격이 다른 금액을 한 표에 나란히 놓으면 누구나 이렇게 된다.
2단계. 성격이 다른 돈을 장부로 가른다
조성액·발행액·보증여력·관리자산은 단위가 같을 뿐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 표에 놓으면 독자는 더한다. 문서가 “두 숫자를 더하지 마시오”라고 주를 달아도 소용없다.
해법은 주석이 아니라 장부를 나누는 것이다.
| 장부 | 내용 | 재무제표 |
|---|---|---|
| A. 자체재원 | 우리가 갖고 있고 손실도 우리가 부담하는 돈 | 자산으로 계상 |
| B. 주선·관리재원 | 우리가 심사·관리만 하고 돈은 사업 주체에 직접 가는 것 | 계상하지 않고 주석 공시 |
이렇게 갈라 놓으면 “우리가 움직이는 자금 총량”과 “우리 책임인 자금”이 동시에 보인다. 부풀리지 않으면서 규모도 잃지 않는다.
3단계. 역산해서 규모를 환산한다
“자부담의 최대 70%를 융자한다”는 문장만으로는 몇 개 마을을 감당하는지 알 수 없다. 단가로 역산한다.
- 500kW 마을 발전소 총사업비 약 6.5억 → 자부담 15%는 약 1.0억 → 그 70%는 약 0.7억
- 그런데 문서에는 융자 한도가 “마을당 1~3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규모가 맞지 않는다.
역산은 한도만 잡아내는 게 아니다. 1단계 재원으로 몇 곳, 몇 MW를 감당하는지 환산하면 **“이 사업이 전체의 몇 %를 하는지”**가 드러난다. 검토 사례에서는 9%였다. 그 숫자를 적어 넣는 것이 문서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머지 91%를 무엇이 담당하는지 설명하게 만들어 계획이 단단해진다.
4단계. 선언이 조문에 있는지 본다
“시민이 소유하고 시민이 결정한다”고 쓴 문서의 정관을 보면, 시민위원은 이사 후보를 추천하고 정관 변경에 의견을 제출할 수 있었다. 최종 선임은 이사회가 했다. 재신임 조항은 “물을 수 있다”고만 하고 가결되면 어떻게 되는지가 없었다.
추천과 의견 청취는 권한이 아니다. 선언을 조문으로 옮기려면 동의권과 효력 규정이 필요하다.
- “이사의 선임, 정관의 변경, 해산은 총회의 동의를 받아야 효력이 생긴다”
- “재신임이 부결된 임원은 즉시 퇴임한다”
선언을 점검할 때 물을 것은 하나다. 그 문장이 지켜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답이 없으면 조문이 아니라 수사다.
5단계. 법은 반드시 원문으로 — 열거에서 “없는 것”을 찾는다
문서에 “○○법 제17조에 따라”라고 적혀 있으면 그 조문을 직접 연다. 이번에 법률 원문을 대조해 보니 이렇게 갈렸다.
맞았던 것
- 조문 번호(중개기관 제17조, 전담기관 제18조)가 정확했다
- 걱정하던 “업력 요건”은 아예 없었다
틀렸던 것
- 지정권자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장관이었다
새로 나온 것
-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본금”이라는 새 관문이 있었다
- 그리고 가장 큰 것 — 제1항은 “투자·융자 등 금융 중개업무”라고 하는데, 제2항의 기능 열거에 직접 융자가 없었다. 기금 관리·운용 위탁, 기부금품 모집, 지원사업, 금융기관과의 중개뿐이었다.
열거 조항은 열거된 것만 읽지 말고 빠진 것을 찾아라. 우리 사업의 핵심 행위가 열거에서 빠져 있고 대통령령에 위임돼 있다면, 그게 그 사업의 최대 리스크다.
법을 확인했다고 파란 표시를 그냥 두어서도 안 된다. 확인된 것은 반드시 표시를 해제하고 근거 조문을 적는다. 그러지 않으면 목록이 부풀어 진짜 쟁점이 묻힌다.
6단계. 확인할 것을 파랗게 두고 한자리에 모은다
본문에서는 해당 구절만 파란 굵은 글씨로 둔다. 그리고 문서 끝에 일람표를 만든다.
| 번호 | 확인 사항 | 확인처 | 시기 | 미확인 시 영향 |
|---|---|---|---|---|
| 1 | 우리 사업에 등록이 필요한가 | 소관 부처 | 포럼 단계 즉시 | 사업 개시 불가 |
마지막 칸이 이 표의 심장이다. “미확인 시 영향”이 없으면 그냥 할 일 목록이고, 있으면 우선순위가 저절로 정해진다. 사업이 멈추는 항목과 수치가 조금 바뀌는 항목은 급한 정도가 다르다.
일람표는 두 개로 나눈다. 「확인을 마친 항목」(확인 결과와 근거 조문)과 「확인이 필요한 사항」. 앞의 표가 있어야 검토가 진전됐다는 것이 보인다.
7단계. 위임된 것은 의견서로 분기한다
시행령·조례에 위임된 사항이 모이면 별도 문서로 떼어낸다. 계획서 안에 과제로만 적어 두면 아무도 제출하지 않는다.
의견서의 각 항목은 다섯 칸으로 쓴다.
관련 조항 / 쟁점 / 제안 조문안 / 제안 이유 / 미반영 시 영향
제안 조문안은 「제○조(제목) ① … ② …」 형태로, 그대로 옮겨 붙일 수 있게 쓴다. 부처가 문장을 다시 만들 필요가 없을수록 반영될 확률이 올라간다.
법리의 한계는 지킨다. 시행령으로 다른 법률의 적용 범위를 정하는 것은 위임을 넘는다. 그럴 때는 두 갈래로 쓴다 — 시행령에는 확인 절차만 두고, 근본 정리는 법률 개정으로 함께 건의한다.
시기가 중요하다. 법 공포부터 시행까지가 시행령을 만드는 기간이다. 그 사이에 입법예고가 공고된다. 우리가 조직을 준비하는 시기가 곧 의견을 낼 수 있는 시기다. 이 창이 닫히면 우리 사업의 범위가 우리 없이 정해진다.
교훈
검산은 독해보다 강하다. 잘 쓴 문서일수록 눈으로는 구멍이 안 보인다. 표의 숫자를 더하고 단가로 역산하는 30분이 며칠의 논쟁을 줄인다.
부풀리지 않는 것이 설득력을 높인다. “전체의 9%를 감당한다”고 적으면 약해 보일 것 같지만, 오히려 나머지를 누가 하는지 설명하게 만들어 계획이 단단해진다. 반대로 합산해서 크게 보이게 만든 숫자는 첫 질문에 무너진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표시하는 것이 문서의 신뢰를 만든다. 파란 글씨는 약점의 고백이 아니라 검토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를 보여주는 지도다. 읽는 사람은 그 표시를 보고 “이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안다”고 판단한다.
법은 기회의 창을 열어 주지만 창은 오래 열려 있지 않다. 공포와 시행 사이가 그 창이다.
참고
- 실증: 전남광주해바람물자산재단 설립제안서 검토(2026-09-25) — 초안 32건 지적 → 전면 개정 → 법률 원문 대조 → 시행령 의견서 분기
- 도구: hwpx 문서에서 특정 구간만 파란 굵은 글씨로 만들고 표까지 재조립하는 방법은 사교원 스킬
hwpx-blue-annotated-doc에 정리 - 함께 읽기: 새로-통과된-법을-우리-조직과-사업계획에-반영하기 — 법 통과 시점의 검증과 조직 설계 매핑
문서 정리 = 데카(deka2026)